항목 ID | GC04401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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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堂祭 |
이칭/별칭 | 당산제,별신제,정호제,천제,산신제,미륵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일대에서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모시는 마을 제사.
[개설]
당산신(堂山神) 등의 당신을 모시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의례로서 당제 혹은 당마제·당고사·당산제로도 불린다. 호남과 영남, 서해안 등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지만, 호남에는 다른 지역과 다른 문화적 특성이 있다. 광주·전남의 당산제는 제사형·풍물형·무속형·혼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제사형은 주로 유교적 차례의 양식으로 많이 분포하고, 풍물형은 풍물패 위주 양식으로 서해안 지역 일부에 분포하며, 남해안 및 일부 도서 지역의 무속형은 무당의 주제 아래 수행되는 유형이며, 혼합형은 둘 이상이 혼합된 것으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혼합형의 경우, 제장(祭場)은 제단형(祭壇型)과 제당형(祭堂型)이 있다. 제단형은 수목이 신체인 경우가 많다. 그 앞에 소박하게 제단 위에 제상을 차려 제사를 모신다. 제당형은 일반적으로 도서·해안 지역에 많다. 또한 인공물인 장승·입석·솟대 등을 함께 당산제에서 모시는 마을도 있다. 그러나 제장이 복수인 경우에는 제당형과 제단형이 결합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당산신의 신체나 거처가 다중적으로 표현된다.
[당산제의 제사 날짜]
당산제는 매년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일종의 세시풍속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날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하나는 매년 특정한 날을 제일로 삼은 경우요, 다른 하나는 날받이를 하는 경우다. 후자보다는 전자의 예가 많은 편이며, 특히 영암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제일은 음력 정월 대보름 자시(子時)로서, 14일 밤에 시작하여 15일 새벽에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보름 에 당산제가 많은 까닭은 달과 관계가 깊다. 달과 풍요다산과의 상징적 관계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과 자연종교적 믿음에 의하여 최초의 만월은 가장 생생력(生生力)이 클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믿음 하에 대보름이 제일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날받이를 하는 경우라도 대개는 음력 정월 초에 모신다. 그러나 특이하게 덕진면의 3개 마을에서는 음력 6월 15일 유두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15일 기준이라는 점에서 달의 생생력과 관련이 깊다.
또 대개는 하루에 당산제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연중 2회 또는 사흘에 걸쳐 제사를 모시는 예도 있어서 주목된다. 남해신사가 있는 옥야리 남해포 마을에서는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마을 제사로 보기는 어렵다. 폐허가 된 남해신사를 2001년 복원하면서 2003년부터 마을보다는 보존회 주관으로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향교의 춘추 제향을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른 특이한 예로는 용흥리 용천 마을로서 사흘간에 걸쳐 제사를 모신다. 상당, 중당, 하당에 각기 음력 1월 5일, 6일, 7일로 나누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최근 하나의 경향으로 본래 대보름에 모시던 마을이 최근 들어 음력 정월 열흘 안쪽으로 날짜를 앞당겨 모시는 예를 볼 수 있다. 당산제를 모시기에 앞서 혹시 정월달에 마을에 궂은 일이 있으면, 당산제를 다음 달로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가능하면 날짜를 앞당겨 잡는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민간신앙의 문법상 밤 또는 새벽에 당산제를 모시는 것이 상례이지만, 편의상 낮 시간대로 당산제를 옮겨 모시는 사례도 드물지는 않다. 또한 편의주의에 따라 전반적으로 당산제를 모시는 시간은 물론 금기를 지키는 기간도 짧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당산제의 장소와 당산의 신체]
당산제를 모시는 장소는 마을 안 또는 마을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며, 그 형태는 제단에서 모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제단형은 수목이나 바위가 신체인 경우가 많고, 소박한 제단 위에 제상을 차려 제사를 모신다. 또 나무나 바위가 아닌 인공물, 입석 등을 함께 모시는 마을도 있다. 예전에는 장승이나 솟대 등도 함께 마을에서 제사를 모셨겠지만, 지금 영암에서 그러한 예는 찾기 어렵다. 다만 미륵이라 하여 학계리에 미륵불을 당신으로 모시는 예가 보인다. 제단이 아닌 제당을 지어서 그 안에서 제사를 모시는 예도 있다. 한때 새 마을 사업을 하면서 제당을 없앤 마을이 많았다. 그러나 근래에는 전에 제당이 없었던 마을들조차도 새롭게 제당을 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마을들은 대개 편의적인 용도에 의해 제당을 새로 짓는다. 즉 대보름 경에는 날씨가 춥고 바람이 많아 노천에서 제사를 모시기 어렵기 때문에 제당 안에서 제사를 모시기 위한 방편으로 제당을 짓는 것이다. 월롱리의 경우는 원래 제당이 없었지만, 군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마을 기금을 모아 제당을 지었다. 이는 본래 없던 것을 제사를 모시기에 편하도록 마을에서 결의를 하여 짓게 된 예이다. 또 남해신사의 경우는 원래 관에서 모시던 것이 복원되면서 민간으로 제사가 넘어온 것이다.
제신의 구성은 매우 다양하여 일괄적으로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1위, 2위, 또는 그 이상의 신위도 있다. 가장 일반적이며, 공통적인 제신의 구성은 두 분의 당산신을 모시는 예이다. 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가 모셔진다. 이는 천부지모(天父地母)라는 신격 구성의 양식으로 보이며, 부부, 남녀, 음양의 신격 구성의 예이다.
한편 최근 제신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의 무의식적 원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점점 없어지고 나서 최후 1위의 신격만 모실 경우, 지금까지 조사된 사례로 보면 예외 없이 할머니 당산만 남은 것이다. 영암의 당산제는 농경문화를 기저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여신[지모신]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이 마지막 보루로 지켜지고 있는 예로 보겠다.
[제관의 선정과 역할]
여기서 말하는 제관은 당산제에 참례하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당산제는 거의 제물을 갖추어 모시기 때문에 제물을 장만하는 준비 과정이 매우 중시된다. 일반적으로 제사에 필요한 사람을 그 역할별로 나누면, 제수를 준비하는 사람, 절을 하는 헌관, 독축을 하는 축관, 집례를 하는 집사 등이며, 뒷심부름을 맡을 사람을 따로 뽑기도 한다. 또 당산굿을 치는 경우는 풍물을 칠 사람을 선정하는 예도 있다.
제관들 중에서도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을 선정할 때 가장 엄격한 자격 요건을 따진다. 다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부정이 타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뽑지만, 특히 제물을 마련하는 사람의 경우는 생기복덕을 보아 맞는 사람을 선정하는 경우도 있으며, 개인은 물론 집안에 유고가 있는 사람은 제외된다. 유고란 아직 상복을 입고 있는 경우, 집안에 산고가 든 경우, 정월 들어 개고기를 먹은 경우, 기우 기간 동안 부인이 달거리가 있는 경우 등을 피하며, 또 어린아이나 과년한 처녀가 있는 가정도 화주 선정 시 제외된다. 또 준비 과정에 있어서도 화주는 가장 엄격한 금기 사항을 지켜야 한다. 소변을 보면 손발을 씻고, 대변을 보면 찬물에 목욕을 해야 한다. 그래서 화주로 선정되면 식사를 줄이거나 아예 금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부부생활을 해서도 안 되고, 관습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만나서도 안 되며, 궂은 곳에 출입을 해서도 안 되고, 좋지 못한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과거에는 그해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으로 선정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마을 총회의 결정을 따랐다. 또 과거에는 복을 받기 위해, 공을 들이기 위해 이를 자청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나, 최근에는 마을 사람 거의가 이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마을 부녀회가 마을 회관에서 제물을 준비하여 당산제를 모시거나 이장이나 새 마을 지도자가 역할을 대신하는 마을도 늘고 있다.
제사를 모실 사람들이 선정되고 나면 여러 가지 금기가 부과된다. 금기를 지키는 일정은 마을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인 하나의 현상은 그 기간이 점점 짧아져 왔다는 것이다. 일주일 또는 열흘, 심지어는 보름간 가해졌던 금기 기간이 요즈음은 길어야 사흘을 넘지 않는다. 또한 그 금기 내용도 크게 완화된 형편이다. 그 기간 동안에 마을 입구와 당산, 당샘 등에 금줄을 걸고, 또 제관의 집에도 금줄을 건다. 마을에 따라서는 금토[황토]를 까는 지역도 있다.
[제사 비용과 제물]
제사 비용은 마을 사람 모두를 당산제와 연결짓는 하나의 관행적 양식이다. 직접 당산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비를 낸다는 것은 당산을 섬기는 뜻과 책임, 그리고 소속감이 실리기 때문에 제비를 통해 마을 사람 전체와 당산신이 연결되는 것이다. 당산제 자체는 제관들에 의해 수행되지만, 이러한 직접 수행이 아닌 경우라도 제비를 낸 모든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당산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제비를 마련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마을의 제답(祭畓) 수입금으로 충당하는 경우, 호구전으로 거출하는 방식, 그리고 인구전으로 걷는 방식 등이 있다. 근래에는 외지에 나가 사는 출향인 중에서 당산제의 비용 일부를 부담하거나 제수를 직접 기부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이럴 경우 당산제를 모시면서 특별히 그런 사람을 위해 소지를 따로 올려주는 것으로 답한다. 또 근래에는 행정관청에서 전통문화 사업의 지원 차원에서 소정의 비용을 마을에 제공하기도 한다.
근래 시골에도 교회가 많이 들어서면서 제비로 인한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곳도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이면서도 제사 비용 분담을 거부하기 때문에 알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새로운 이주민이 늘어난 마을에서도 역시 당산제를 위한 제비 추렴과 관련한 갈등이 보이기도 한다. 과거부터 살아온 사람들은 당연히 제비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새로 이주해 온 사람은 제비에 대해 부정적일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영암군의 당산제와 관련된 요소 중에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예는 바로 제물이라 할 것이다. 당산제의 준비는 구체적으로 술을 앉히는 날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제주를 만들어 썼던 시절에는 당산제 며칠 전에 제주를 먼저 앉히는데, 이를 위해 먼저 마을에서 깨끗한 우물을 당샘으로 지정하여 금줄을 치고, 그 물을 길어 제주를 앉힌다. 다른 일반 가정에서는 당산제가 끝날 동안 당샘을 사용하지 못한다.
당산제를 위한 경비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제수 비용이다. 제물을 장만하면서 제상에 올릴 정도만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날 마을 사람 모두가 음복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넉넉하게 음식을 장만한다. 물론 제상에 올릴 제수와 음복 때 마을 사람들이 먹을 음식은 엄격히 구분해 둔다.
[영암군의 당산제 현황]
호남 문화 연구소에서 실시한 전남의 마을굿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조사에 따르면 영암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 마을은 2007년도 기준으로 모두 39개 마을로 조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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