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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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문수진 |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의 역사.
[고대]
‘성남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지역이 한강으로 흐르는 탄천 주변의 비옥한 평야는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실제로 여주시과 화성시, 광주시 도척(都尺) 등 인근지역에서 구석기가 발견되고, 서울 암사동, 하남시 미사동 등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금토동에서 민무늬토기, 삼평동에서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민무늬토기, 수진동에서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최근 분당지역에 대한 ‘성남분당지구문화유적지표조사(1989)’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이 지역에 116기나 되는 지석묘와 8기의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것은 한강 유역의 중부지방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서 청동기시대 집중적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진국(辰國)의 성립 이전시대부터 ‘초기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지가 광주(廣州), 즉 오늘날의 성남지역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삼한, 그 중 마한(馬韓)의 중심지가 백제국(伯濟國)으로서 삼국 중 백제로 성장하게 되었다. 백제의 지배세력은 북방 부여족의 분파 이동과정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백제는 왕실이 스스로의 성(姓)을 부여씨(夫餘氏)라 하였고 남천해서는 한때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칭한 적이 있다. 백제가 부여와 고구려 계통의 세력집단이 세운 나라임을 시사하는 예는 서울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는 백제의 지배세력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주민들과 밀접한 문화적, 혈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는 백제의 지배세력이 유이민 세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의 한성시대에는 인접한 성남지역이 역사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5백년의 한성백제시대에는 고구려와 겨루면서 중국의 남조와 외교관계를 갖고 일본에도 문화를 전해주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남하에 금강 유역으로 밀려나면서 백제와 신라가 다시 한강 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80여년간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성남지역’은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의 협공으로 잠시 백제가 차지하였으나 곧바로 신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 통일신라까지 이어진다.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하면서 대당외교에도 직접 나설 수 있고 백제와 고구려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었다. 결국 신라가 통일하게 되고, 지방을 9주로 나눌 때 ‘성남지역’은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에 속하게 된다. 한산주는 다른 주보다 배 이상의 면적에 북방의 국경을 접하고 각 주에 한 개씩밖에 없는 정(停 : 지방사단과 같은 군인부대)을 두 개나 두고 패강진(浿江鎭) 등의 군사력도 보유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한산주도독으로 있던 김대문이 「한산기(漢山記)」를 지어 이 지역의 경승을 노래하였던 것도 이곳의 빼어난 경치와 풍요한 물산에 대해 감탄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
후삼국시대 ‘성남지역’은 일찍이 궁예의 후고려[태봉]에 속하였다가 왕건의 고려에 귀속되었다. 비록 왕건 사후에 반역하였지만 통일과정까지 든든한 후원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규(王規)의 기반이 이곳이었을 것이다. 왕규는 광주의 호족으로 두 딸을 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 제15, 16왕비가 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혜종 때에 반란을 일으켜 거세되었다.
940년(태조 23) 한주를 광주(廣州)로 바꾸고, 983년(성종 2) 12주에 목을 둘 때 광주목으로 불리었다. 995년 12절도사를 둘 때는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으며, 1012년(현종 3)에는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1018년 12목을 줄여 8목으로 고칠 때 광주목으로 되었다. 이때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눌 때 광주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관할하는 양광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1395년(태조 4) 광주목은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세조 때 진(鎭)을 두어 광주목의 진관 소속으로 여주목, 이천도호부, 양근군(楊根郡)과 지평현(砥平縣), 음죽현(陰竹縣), 양지현(陽智縣), 죽산현(竹山縣), 과천현(果川縣)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 고을이 잠시 혁파되었다가 중종 초기에 복구되었으며, 1559년(명종 14)에 목사를 두었고 1566년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 1573년(선조 6)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다가 1577년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으며, 1623년(인조 1)에 유수(留守)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하였다.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이듬해인 1627년 주치(州治)를 성내로 옮겼고 1633년 목사가 토포사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청군에 대항하였고, 1637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승격되었다. 1652년(효종 5) 수어부사를 두었다가 1655년 부윤으로 복구시켰다. 1683년(숙종 9) 유수 겸 수어사로 승격되었으며, 1690년 부윤 겸 방어사, 토포사가 설치되었다가 1694년 부윤으로 되었다. 1750년(영조 25) 다시 유수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하다가 1759년에 부윤으로 되었으며, 1795년(정조 19) 유수 겸 수어사로 승격되었다.
[근대]
1895년 광주군이 되어 한성부의 관할이 되었으며, 1896년 경기도 광주부가 되었고, 1906년 광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17년에는 남한산성 안에 있던 군청을 광주면(지금의 광주시)으로 옮겼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3월 27일에 중부면, 동부면, 서부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3월 28일에는 광주읍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현대]
1946년 2월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설치로 중부면에서 관할하던 남한산성 서남방 12㎞의 일원인 6개리가 단일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56년 당시 광주군의 농가 호수는 총 15,351호였다. 이를 업종별로는 논농사 12,745호, 기타 과수, 채소, 특수직물, 축산 등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남지역 일원의 광주군은 경기도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볼 때, 채소와 밭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의외로 많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민 수에 비하여 농경지 소유가 적은 영세성을 면치 못한 산간 농촌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63년 대왕면의 세곡리, 율현리,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5개 마을이 1963년 1월 1일로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나머지 4개면의 관할 마을은 오늘날의 성남시 관할지역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장차 성남시 형성의 준비단계이면서 ‘광주대단지 이주사업’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모란개척사업’이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 일부와 중부면 탄리 일부지역에 해당되었다. 1960년대 후반 서울 인구가 400만명에 육박할 당시, 인구분산을 위해 성남지역이 채택된 것도 그 역사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1968년 주택단지경영사업 인가로 서울시 무허가건물 일소에 따른 철거민정착주택단지로 조성되었다. 현재의 태평동, 수진동, 단대동, 은행동, 금광동, 상대원동 등이 서울시의 불량무허가 난민 55만명에 대한 1차적인 이주지역으로 정해졌다. 이와 함께 개발은 서울시에서, 일반행정은 경기도에서 관장하는 이원행정체제가 되었으며, 1969년에는 주택단지조성작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철거민이 이송되어 가수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70년 9월 19일 경기도와 서울시의 행정협약이 체결되어 이원행정으로 빚어지는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1971년 8월 10일에는 서울시의 전매입주자에 대한 시가일시불토지불하방침과 경기도의 가옥취득세부과조치 때문에 이것을 시정하도록 요구하고 나선 입주민들의 소요사태를 이룬 8.10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급팽창하는 도시 규모와 주민에 적응하는 행정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어 원래의 중부면 6개리와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을 합하여 128.5㎢를 관할하게 되었다.1971년 10월 14일 서울시의 주택단지사업을 경기도에서 인수하여 단지명을 광주대단지에서 성남단지로 고쳤으며, 그해 10월 30일에는 성남출장소 관할지 전역과 인접한 용인군 수지면 일부 4.078㎢를 포함하는 132.578㎢(4,010만 평) 지역에 대한 장기종합도시기본계획인 성남도시기본계획이 결정, 고시되었다. 1973년 7월 1일 비로소 독립시로 승격되어 개발 초기의 무리와 과도기의 혼란 및 기형적 성장 등을 탈피하면서 도시체질을 개선하여 현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서울시의 철거난민 입주 인가를 받은 날로부터 5년 3개월만에 전국 36개시 가운데 11위의 인구수 20만의 도시가 되었다. 1989년 5월 구제 실시에 따라 수정구와 중원구를 설치하였다.
88올림픽을 계기로 부동산투기, 수도권 인구분산 등의 계획에 따라 200만호 주택 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1989년 4월 27일에 성남시 남단 자연녹지일원과 고양군 일산 등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분당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에는 이 지역에는 4천여 가구, 12,200명이 살고 있었다. 한국토지공사에서 총 4조 2천억원을 투자하여 주택 97,580호, 인구 39만명을 수용하는 신도시를 조성함으로써 수도권의 주택문제 해결과 주택가격 안정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분당신도시는 ‘쾌적한 자족도시’, ‘21세기형 미래도시’라는 표어를 걸고 개발되었다. 1989년 11월 5일 1단계공사가 착공되고 1991년 9월 17일 분당구로 승격되었으며, 9월 30일 시범단지 첫 입주가 이루어졌다. 1994년 9월 1일 분당선[현 수인분당선] 전철이 개통되고, 1996년 11월 23일 8호선이 개통되어 교통난이 해결되었다.
이후 성남시는 법정동간 경계조정과 행정동 분동을 통해 1996년 3개구 44개동의 행정동이 형성되었으며, 2000년에는 행정동 명칭을 대폭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