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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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炭川先生遺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관수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지직의 문집.
[개설]
이지직(李之直)[1354~1419]은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평(伯平), 호는 탄천(炭川)이다. 1380년(우왕 6) 과거에 급제하고, 한림, 교리를 거쳐 관동과 호서 지방의 관찰사 등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1398년(태조 7) 보문각직제학 재임 당시 소도 변란이 일어 광주[지금의 성남]의 탄천(炭川)에 은거하며 독서를 일삼아 사람들이 그를 ‘탄천선생’이라 불렀다.
[편찬/발간경위]
『탄천선생유고』는 그의 아버지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둔촌유고』에 『둔촌선생세고(遁村先生世稿)』라는 제목 아래 아우인 문숙공(文肅公) 이지강(李之剛), 이지직의 둘째아들인 풍애(楓崖) 이인손(李仁孫)의 글과 함께 합집으로 편찬되어 간행되었다.
[형태]
『탄천선생유고』는 1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크기는 가로 16.6㎝, 세로 20.8㎝이다.
[구성/내용]
『탄천선생유고』에는 이지직이 관동의 안찰사로 있을 때 양양의 이사군(李使君)에게 경치 좋은 곳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치하한 3편의 시 「증양양이사군삼수(贈襄陽李使君三首)」, 평창군에서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노래한 시 「평창군제영(平昌郡題詠)」, 동해에 사는 벗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 「증우인(贈友人)」 등의 시가 실려 있다.
부록으로 이지직의 일생을 기록한 「유사(遺事)」에는 이지직이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도학의 종지(宗旨)을 얻어 학식이 높고 일처리가 엄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방석을 제거하려 했을 때, 그 부당함을 알리다가 삭탈당하고 변계량의 도움으로 자손들도 금고(禁錮)를 당하는 데 그쳤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한적한 광주 탄천으로 옮겨와 단사표음(簞食瓢飮)[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 즉 청빈한 생활의 비유]의 삶을 살아서 그때 학자들이 탄천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태종의 임종 시에 태종은 그의 충정을 한나라의 충신 주운(朱雲)에 견주면서 데려다 쓰라고 하여 세종이 그를 불러들였으나, 끝내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