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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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중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송암(松菴). 찬성사(贊成事)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원주목사 권우(權愚)의 손자이자 사직(司直) 권굉(權硡)의 아들이며, 현감 이효언(李孝彦)의 사위이다.
[활동사항]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주서(注書)를 거친 후 병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에 오르고 재차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전주부윤이 되어서는 경내에 정여립(鄭汝立)이 살고 있었으나 사람됨을 꺼려서 끊고 만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안변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586년(선조 19) 형조참판이 되고, 충청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589년 병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정철(鄭澈) 실각과 함께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임진왜란 때 특별히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어 임진강의 방어에 최선을 다했으나 패배한 후 삭령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모아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권율(權慄) 등과 함께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의병을 규합해 왜병과 싸웠다. 1593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으며,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추진하는 화의에 반대하였다. 그 뒤 공조판서가 되어 왜병에 의해 파헤쳐진 선릉(宣凌)과 정릉(靖凌)의 보수를 주관하였다. 1594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상소로 자신의 의견을 자주 개진하였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
권징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있는 안동권씨 묘역에 위치하여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익(貞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