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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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孟萬澤 |
영어공식명칭 | Maeng Mantaek |
이칭/별칭 | 시중(施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있는 봉국사 대광명전에 위패가 모셔졌던 명선공주의 약혼남이자 조선 후기 문관.
[개설]
맹만택(孟萬澤)[1660~1710]은 현종(顯宗)의 장녀인 명선공주(明善公主)와 약혼을 했는데, 가례청까지 설치되었으나 어머니 홍씨의 상을 당하며 혼사가 연기되었다. 곧 이어 당시 유행한 천연두로 현종의 둘째 딸인 명혜(明惠)공주가 먼저 죽고, 석 달 만에 장녀인 명선공주가 죽었다. 현종은 맹만택이 상복을 입어 결혼이 성사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되면 평생을 홀아비로 살아야 하였기에 신하들이 반대하여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
[가계]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시중(施中)이다. 조선 전기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맹세형(孟世衡), 아버지는 승지 맹주서(孟胄瑞)이고, 어머니는 홍처심(洪處深)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다.
[활동 사항]
맹만택은 현종의 장녀 명선공주와 약혼을 하고 가례청까지 설치되어 ‘신안위(新安尉)’에 봉해졌으나 어머니 홍씨가 사망하면서 혼사가 연기되었다. 당시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현종의 둘째 딸인 명혜공주가 1673년(현종 14) 음력 4월 27일에 죽고 불과 3개월여 만인 음력 8월 2일에 장녀인 명선공주도 죽었다. 명혜공주는 아홉 살, 명선공주는 열세 살이었다. 현종은 명선공주가 죽었어도 맹만택이 상복을 입어 혼인이 성사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되면 맹만택은 평생 홀아비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경억(李慶億) 등 대신들의 반대로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헌부의 건의로 신안위 작위도 환수되었다.
맹만택은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음보로 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1698년(숙종 24) 알성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을 지냈고, 강원도 감진어사, 황해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대사관 등을 지냈다.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지리에 능통하였다. 맹만택은 우암(尤齋)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유공권(柳公權)과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체에 능통하다고 알려져 있다.
[상훈과 추모]
맹만택의 약혼녀였던 명선공주와 그 동생인 명혜공주의 제사를 봉국사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제사는 지내지 않고 ‘효(孝)사랑 문화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위령천도재가 진행된다. 성남문화원에서 ‘공주명복기원 천도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봉국사 대광명전은 국가 지정 보물이며, 봉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