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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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泰東 |
영어공식명칭 | Gim Tae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개항기 의병.
[개설]
김태동(金泰東)[1888~?]은 독일어를 공부하며 인쇄소 문선으로 일하다 성남 출신의 남상목(南相穆)이 일으킨 의병 부대에 종사(從事)로 가담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5년(고종 42)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해 대한제국은 일본한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이어 1907년(순종 1) 7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고 내정간섭까지 받게 되자 우리 민족은 의병을 일으켜 항전에 나섰으며, 특히 군대 해산으로 군인들이 대거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항일 전쟁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이때 성남 지역에서는 남상목과 윤치장(尹致章)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김태동은 당시 남상목 의병 부대에 가담하였다. 남상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판교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벌목을 하면서 판교 주민들에게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노동력만 착취한 것에 분개하여 항의하다가 파출소에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김태동은 당시 독일어를 공부하던 학생으로 인쇄소에서 문선(文選)으로 일하고 있어서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의병 부대의 새로운 소식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태동의 집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대한제국 시위대(侍衛隊) 출신인 김재선(金在善)과 은(銀) 세공업에 종사하던 송주상(宋柱祥) 등이었다. 김태동은 이들과 함께 김경화(金景化)·이시영(李時永) 등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남상목 의병 부대에 투신하였다. 남상목은 송주상·김태동은 종사(從事),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 김경화·이시영을 포군으로 삼아 진영을 확대 개편하고 충청북도 음성(陰城)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그리고 죽산(竹山)에서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봉규 의병 부대에서 연합 의병대가 노획한 전과물뿐 아니라 남상목 의병 부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까지 모두 빼앗아 갔다. 이 때문에 남상목은 해외로 망명하고자 성남의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러 가던 중 밀고를 받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김태동은 다시 덕어(德語)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공부하다가 1908년 3월 붙잡혀서 유형(流刑) 10년의 고초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태동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