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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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春善 |
영어공식명칭 | Gang Chuns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한 개항기 의병.
[개설]
강춘선(姜春善)은 1907년(순종 1) 남상목(南相穆)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후군장(後軍將)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강춘선은 남상목 의병 부대에서 후군장의 직책을 맡았다. 의병장 남상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출생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기 전, 일본인들이 판교 지역에서 벌목을 해 갔는데, 주민들에게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에 항의하다가 주재소[지금의 파출소]에 잡혀 가서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데 이어 1907년 6월에 고종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한 것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고 일제는 내정 간섭까지 하게 되었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기존의 의병 부대에 가담하였는데, 이런 군인들의 참여가 남상목 의병 부대의 전투 조직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좌익장(左翼將)을 맡은 김재선(金在善)이 퇴역 군인이었던 점과,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이 포군(砲軍)이었던 점으로 볼 때 후군장이던 강춘선도 군사 지식을 가진 인물로 추정된다. 남상목은 의병 50여 명을 휘하에 두고 구식 총 40여 자루와 신식 서양 총 10여 자루를 무기로 하여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남상목 의병 부대에 참여한 강춘선은 항일전에 여러 차례 참전하였다.
남상목 의병 부대의 조직을 보면 김재선 24세, 송주상(宋柱祥) 22세, 김태동(金泰東) 20세로 모두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 김재선은 시위대의 퇴역병이었다. 김태동은 독일어를 공부하던 사람으로 인쇄소 일을 하였고, 송주상은 은(銀) 세공업에 종사하여 실물 경제에 밝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남상목 의병 부대에서 김재선은 좌익, 송주상·김태동은 종사(從事), 강춘선은 후군장, 김경화·이시영은 포군(砲軍)으로 활동하였다. 일본병과 충청북도 음성(陰城)에서 교전하다 패한 남상목 의병 부대는 죽산(竹山) 칠정사(七亭寺)[칠장사]에 이르러 100여 명을 거느린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안성 시내에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노획물은 많았으나 전봉규 의병 부대에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남상목 의병 부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남상목은 해외로 망명하고자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가던 중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강춘선은 남상목이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옥중 순국하였을 때 전국의 의병 부대에 이를 통고한 「남상목 순국 통고문」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