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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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根學 |
영어공식명칭 | Yi Geunhak |
이칭/별칭 | 원산근학(圓山根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1930년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의 면장을 지내며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
[개설]
일제강점기 돌마면 지역의 행정 책임자는 면장이었는데, 1935년부터 1939년까지는 이근학(李根學)[1896~1963]이 제4대 면장으로 재직하였다. 이어서 1940년부터 1941년까지는 면장의 이름이 ‘원산근학(圓山根鶴)’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근학의 일본 이름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근학은 돌마면에서 7년간 면장으로 재임하였는데, 이는 다른 면장들에 비하여 긴 편이다. 1939년에 돌마면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개통시키고 돌마심상소학교에 교실 증축비를 특별 찬조하여 1940년 6월 면민들이 이근학의 공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웠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버지는 이대영(李大泳)이다.
[활동 사항]
이근학은 아버지에게 한학을 수학하였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면장으로 재임한 초기 이근학은 돌마면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북쪽으로는 중부면과 중대면을 거쳐 서울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광주군 오포면을 경유하여 경안으로 이어지는 면도(面道) 개설에 힘써 1939년에 도로를 개통시켰다. 1936년에 전국적인 가뭄으로 천수답(天水沓) 대작물(代作物)은 거의 전멸 상태였으며, 이에 돌마면 지역에서는 가뭄을 해결하기 위한 민중 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돌마면 여수리 주민 200여 명은 절박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우선 좋은 보(洑)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집행위원장에 이춘영(李春泳)을 선출하고 지주 40여 명과 작인(作人) 200여 명의 동의를 얻어 보(洑)를 허가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할 때 이근학도 힘을 보탰다. 당시 식량난이 극심해지면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1936년 7월에는 돌마면사무소에까지 도둑이 침입하여 숙직원의 자전거를 훔치고, 그 옆 돌마공립보통학교에서 유리창을 뜯고 들어가서 말과 되, 휘장 등을 절취하는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근학은 교실 증축비를 특별 찬조하여 4년제였던 학교를 6년제로 승격시키는 데 공헌하여 1940년 6월 송덕비가 세워졌다. 비문 속에 “교육을 흥하게 하니 이것이 누구의 덕인가”라고 하였다. 이후 송덕비는 지금의 수인분당선 이매역 1번 출구 쪽으로 이전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돌마심상소학교의 후원회장을 지냈다.
한편, 6.25전쟁 이후 지역의 경제를 이끈 것은 직물 공장이었다. 돌마면 지역에서는 이근학이 ‘돌마직물공장(突馬織物工場)’을 운영하고 있었다. 돌마직물공장은 돌마면 여수리에 있었으며 소창직물을 생산하였다. 소창직물은 면(綿)에서 완전히 방적되지 않은 소면사로 줄무늬나 바둑무늬를 낸 평직의 직물로서, 흡수율이 뛰어나고 항균성이 있으며 성글게 짜여져서 거즈로 사용하거나 음식물의 액을 짜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