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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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秉哲 |
영어공식명칭 | YI Byeongcheol |
이칭/별칭 | 여수거사(麗水居士)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종준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8월 15일[음력] - 이병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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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48년 3월 - 여수거사 이병철 자선송덕비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2월 1일[음력] - 이병철 사망 |
출생지 | 이병철 출생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
활동지 | 이병철 활동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
묘소 | 광주이공휘병철지묘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1-1 |
성격 | 관료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대표 경력 | 돌마면협 의원 |
[정의]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지역사회에 기여한 인물.
[개설]
이병철(李秉哲)[1881~1949]은 1920년 대홍수 때 관개사업으로 중촌보(中村洑)와 탄천보(炭川洑)를 건설하여 풍농에 기여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여수거사(麗水居士)이다. 광원군 이극돈(李克墩)의 15세손이다. 부인은 의령남씨 남이숙(南二淑)이고, 아들은 이영래(李英來)이다.
[활동 사항]
1920년에 큰비가 내리면서 밭과 들판을 덮쳤고, 이후 수년 이래에 큰 들판이 황폐해지자 마을이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이병철은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라는 신념에 따라 고심 끝에 가난한 농민에게 세를 받지 않고 중촌보를 비롯하여 탄천보를 쌓고 제방 공사를 하였다. 이런 사업을 하기 전에 농민들은 토지는 물론이고 물을 끌어 댈 보(洑)조차도 개인의 소유로서 착취를 당했는데, 이병철이 주도하여 이근학(李根鶴), 이기영(李崎泳), 홍순석(洪淳錫) 등의 협력을 받아 ‘탄천보’를 쌓았던 것이다. 이렇듯 동분서주하여 탄천 제방을 보호하는 호안 공사를 마쳤으나 땅주인들이 부담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중촌보와 탄천보의 물을 끌어들여서 사용하게 되면서 들판은 새롭게 기름지게 되어 해마다 풍년이 들게 되었다. 지금의 성남아트센터 앞에서부터 성남시청 부근까지가 중촌보와 탄천보의 물을 받는 지역이었다. 이후로 이병철의 큰 뜻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어져 1958년에는 여수제방공사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탄천보를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한때 이병철은 면협 의원(面協議員)을 지내기도 하였다. 1935년 5월 26일 『동아일보』에 그해에 당선된 면협 의원 명단이 기사로 나와 있는데, 돌마 지역의 면협 의원은 한용회(韓龍會), 최하영(崔夏永), 이주현(李柱鉉), 홍순석(洪淳錫), 이만규(李晩珪), 이병철, 이갑규(李甲珪), 정규원(鄭圭元)이었다. 마을 회관 부지도 이병철의 후손이 기증하였다고 전한다.
[묘소]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1-1번지에 이병철 집안의 묘지가 있다. 맨위에 이병철의 묘[광주이공휘병철지묘]가 부인 남이숙과 합장되어 있고, 바로 옆에 아들 이영래와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가 합장된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48년 3월 여수동 마을회관 옆에 ‘여수거사 이병철 자선송덕비’가 건립되었다가 이후 여수초등학교 뒤편으로 옮겨졌다. 비각 안에는 1958년 10월 22일에 쓴 이기문의 「고사」와 홍순천의 「고사」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