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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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潗墓 |
이칭/별칭 | 이질의 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식 |
성격 | 능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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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표주박형 |
건립시기/일시 | 1727년 |
관련인물 | 이질 |
높이 | 1.6m |
지름 | 5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소유자 | 한산이씨 한평군파 종중회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이질 묘.
[개설]
이질[1474~1560]은 명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서(子序)이다.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1368~1438]의 현손이자 봉화현감(奉化縣監) 이장윤(李長潤)[1455~1528]의 아들이다. 1498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관직에 나아갔다. 음직(蔭職)으로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문화·상주·울진·양천·삭령·덕천·장단 등 7개 군의 군수를 역임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러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비록 장수는 누렸지만 말로에 가서는 가정의 형편이 어려웠던 듯하다. 이는 수내동 중앙공원 내에 후손 이백천(白川) 군수가 1728년(영조 4)에 찬한 奉化公三世以下遺事碑(봉화공삼세이하유사비)에 ‘제사를 지낼 때면 가난해서 제사를 잘 차리지 못하였사오니 원컨대 자손이 영화롭게 되면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라는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질은 선조에 대하여는 독실하게 모시고 후손들에 대해서는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80세가 넘었음에도 뜻과 지혜가 명민했으며 필력도 건강하였다. 게다가 앉아 있을 적에도 벽에 기대는 일이 없고,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글 보기를 좋아하였다. 몸소 제사를 지내고 성묘함에 있어서 더욱 공경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사(公事)를 받들어 피하는 일이 없었다.
[위치]
묘역은 성남시 수내동 영장산(靈長山) 아래 장윤 묘 바로 하단에 남서향(南西向)하여 자리 잡고 있다.
[형태]
특이하게도 부인의 묘와 앞뒤로 맞붙어 표주박형을 이루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160㎝, 직경 5m이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8㎝, 너비86.5㎝, 두께29㎝), 상돌(높이19㎝, 너비142㎝, 두께84㎝), 향로석(높이28.5㎝, 너비28.5㎝, 두께22.5㎝), 문인석(높이178㎝, 너비50㎝, 두께43㎝)의 옛 석물이 구비되어 있다. 문인석은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고 있으며 의습선(衣褶線)이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장방형의 받침돌에 월두형 비신을 갖춘 양식]의 묘표(높이181㎝)가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혼유석, 상돌,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금석문]
묘표의 비좌와 비신 월두형으로 비좌는 4면에 안상문과 상부에 복련문이 조식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하다. 비신(높이151㎝, 너비56㎝, 두께20㎝)의 비문은 앞뒤 양면에 있으며 앞면에 세로 두 줄로 ‘朝鮮嘉善大夫韓城君李公秩之墓 貞夫人茂松尹氏祔 後’(조선가선대부한성군이공질지묘 정부인무송윤씨부후), 음기(陰記)에 ‘嗚呼三世遺事碑旣成哈見府君事行而墓前樹表終不可關故玆以崇禎再戊申堅此石仍識于其背七代孫秉鼎書’(오호삼세유사비기성합견부군사행이묘전수표종불가관고자이숭정재무신견차석잉식우기배칠대손병정서)의 내용이 있어 1728년(영조4) 7대손 이병정(李秉鼎)[1678~1701]이 간단한 음기(陰記)를 짓고 썼음을 알 수 있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산이씨 한평군파 종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