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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675
한자 李克墩墓
이칭/별칭 이극돈의 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주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묘역
양식 방형 쌍분
건립시기/일시 1503년
관련인물 이극돈
높이 1.8m
지름 6.5m
소재지 주소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지도보기
소유자 광주이씨 대종회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이극돈(李克墩)의 묘.

[개설]

이극돈[1435년 ~ 150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호는 사봉(四峯)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넷째 아들로 1457년(세조 3) 서령(署令)으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 급제하였다. 1471년 성종 추대에 가담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遠君)에 봉해졌다. 수차례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7년(성종 18)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이후 요직을 거치다가 숭정대부로 올라 좌찬성과 세자우빈객을 역임하였다.

1485년에는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전례(典禮)에 매우 밝았고, 훈구파(勳舊派)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와의 반목이 심하였다. 특히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1498년(연산군 4)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통해 사림파들을 제거한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사화가 있은 후 사초 내용을 곧 왕께 보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어세겸(漁世謙)과 같이 국문을 받고 북청(北靑)에 유배, 파직당하였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익평(翼平)의 시호가 내려졌으나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위치]

이극돈 묘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위치한 태조사의 왼쪽 나지막한 능선에 남향하여 있다.

[형태]

이극돈 묘는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쌍분을 이루고 있다. 방형(方形)의 봉분은 앞면 하단에 높이 30㎝, 너비 150㎝의 장대석 3매로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봉분의 크기는 높이 1.8m, 전후 4.6m, 좌우 6.5m이다. 또한 묘역 아래에는 이면행(李勉行), 이경철(李敬喆), 이경덕(李敬德)의 묘가 있다.

봉분 중앙에 묘표, 장명등과 쌍분인 만큼 각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돌, 향로석 및 좌우로 복두의 문인석 등 다수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상돌은 백색 화강암제로 계체석 위에 놓여 있는데, 크기는 높이 65㎝, 너비 155㎝, 두께 101㎝이다. 장명등은 높이 168㎝로 간주석에 화창은 전후면에 직경 15㎝의 원형이다. 사모지붕에 보주장식이 있으며, 지붕 한 면의 너비는 74㎝, 처마 두께는 9.5㎝이다.

복두(幞頭)의 문인석은 큰 눈, 큰 코에 비해 인중은 희미하고 입은 상대적으로 작다. 턱에 턱수염의 표현이 특이하고 홀(笏)을 마주잡은 손에는 굵은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5단의 옷 주름과 관복은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좌가 높이 215㎝, 얼굴 부분 62㎝이며, 우는 높이 188㎝에 얼굴 부분 62㎝이다.

[금석문]

이극돈의 묘표는 봉분 중앙에 위치하여 백색 화강암제의 비좌와 비신 및 화관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 앞면에는 세로 넉 줄로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純誠佐理功臣封廣原君贈諡翼平公廣州李克墩之墓 貞敬夫人安東權氏祔左’(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순성좌리공신봉광원군증시익평공광주이극돈지묘 정경부인안동권씨부좌)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15대손 이창래(李昌來)가 짓고, 14대손 이영휘(李永輝)가 썼다.

[현황]

이극돈 묘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이씨 대종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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